A Roman fresco of a bronze tragic theater mask hanging on a nail against a red wall, with a faint ghosted double of the mask offset behind it, and a scroll resting on a ledge below

소식 에세이

스크린 위의 에이돌론

놀런의 《오디세이》에 담긴 시간과 신화, 그리고 몇 가지 헛디딤

이 글은 존 선생님이 영어로 쓴 에세이를 한국어로 옮긴 것입니다. 원문 보기(영문) →

고대인들과 함께 나날을 보내다 보면, 그들이 오늘의 문화에 남기는 잔물결에 유난히 민감해집니다. 이 글은 개봉을 앞둔 영화를 두고 흔히 오가는 기대와 화제에 끼고 싶어서 쓴 것이 아닙니다. 계기는 더 단순하고 더 절실했습니다. 학생들의 질문이었습니다. 미국 동부의 보딩스쿨에 다니는 제 학생 몇 명은 다른 학교보다 학년이 일찍 끝나고, 수업에 올 때면 이미 자기 의견을 갖고 옵니다. 그 학생들이 곧 개봉할 크리스토퍼 놀런의 《오디세이》를 어떻게 보느냐고 갈수록 자주 묻습니다. 영화는 2026년 7월 17일에 개봉할 예정이고, 예고편은 지난 12월부터 공개되어 있습니다. 마침 지금 심화 라틴 시 수업은 거의 전부 베르길리우스를 중심으로 짜여 있습니다. 베르길리우스는 놀런이 다루는 바로 그 시를 지은 호메로스를 평생 의식하며 정성껏 본받은 시인입니다. 그러니 이 질문은 수업에서 벗어난 곁가지라기보다 수업이 자연스럽게 뻗어 나간 자리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래는 그 질문에 걸맞은 진지함으로 답해 보려는 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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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아》는 서양 서사 문학의 출발점입니다. 오늘날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산문보다 몇 세기나 앞섭니다. 떠도는 영웅, 집을 향한 그리움, 신의 뜻과 인간의 꾀가 얽히는 방식 같은 틀을 이 시가 세웠고,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서 밀턴의 《실낙원》에 이르기까지 뒤따른 모든 서사시가 그 틀과 씨름하고 그것을 고쳐 썼습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는 단지 집에 돌아가려는 병사가 아니라 mētis의 화신입니다. 메티스는 그리스인들이 특별히 귀하게 여긴 덕목으로, 꾀 많은 지성, 실천적 지혜,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헤쳐 나가는 능력을 말합니다. 오디세우스를 규정하는 것은 힘도 아름다움도 아닌 바로 이 자질입니다. 생각으로 살아남는 능력, 상황이 요구하는 대로 자신을 바꾸는 능력, 인간의 고통에 무심한 우주 속에서 무엇보다 polytropos, 곧 ‘여러 번 방향을 트는 사람’이 됨으로써 길을 찾아내는 능력입니다.

다행히 놀런도 이 점을 이해하고 있는 듯합니다. 놀런은 이 이야기에 끌린 이유를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있습니다. 괴물도, 볼거리도 아니고 인물 자체, 곧 그 영리함과 창의력, 병사의 갑옷 뒤에 숨은 전략가의 정신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믿고 싶어집니다. 놀런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지성이 어떻게 짜여 있는지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메멘토》와 《인셉션》의 퍼즐 상자 같은 플롯, 《다크 나이트》의 도덕적 기하학, 《덩케르크》와 《테넷》의 겹겹이 쌓인 시간이 그렇습니다. 영화 제목에서도 라틴어 감각이 드러납니다. Memento, Inception, Interstellar, Tenet는 각각 기억, 시작, 별, 붙잡음을 뜻하는 어휘에서 왔습니다. 라틴어 어근으로 영화 이름을 짓는 감독이라면 고전을 다룰 때 무엇이 요구되는지 전혀 모르지는 않으리라고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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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규모는 그 야심만큼이나 만만치 않습니다. 그리스, 이탈리아, 아이슬란드, 모로코, 스코틀랜드에서 현지 촬영을 했고, 전편을 65mm 아이맥스 카메라로 찍은 첫 할리우드 장편 영화입니다. 기술적으로 상당히 대담한 시도입니다. 《오펜하이머》의 음악으로 그 영화의 진짜 성취 가운데 하나를 만들어 낸 루드비히 고란손이 다시 음악을 맡았습니다. 촬영 감독은 호이트 반 호이테마로, 놀런과 함께 힘 있는 화면을 만들어 온 사람입니다. 형식적 야심이라는 면에서만 보면 이 영화는 진지하게 대할 만합니다.

맷 데이먼이 연기하는 오디세우스 곁에 모인 배우들은 누가 봐도 대단합니다. 앤 해서웨이가 페넬로페, 톰 홀랜드가 텔레마코스, 젠데이아가 아테나, 샤를리즈 테론이 칼립소, 루피타 뇽오가 트로이의 헬레네를 맡았고, 로버트 패틴슨은 구혼자 가운데 한 명으로 나옵니다. 놀런은 《오디세이아》의 구조도 이야기했습니다. 서로 맞물리는 여러 시간, 지난 일을 돌이켜 들려주는 서술, 시가 시간을 스스로 접어 넣는 방식 같은 것입니다. 평생 시간이라는 현상을 파고든 감독이 호메로스에게서 자신과 닮은 정신을 발견한 것은 이해할 만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distentio animi, 곧 시간은 객관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주관적으로 늘어나는 것이며, 과거는 기억이고 현재는 주의이며 미래는 기대라는 생각은 오디세우스의 심리 상태를 거의 섬뜩할 만큼 정확하게 묘사합니다. 십 년 동안 떠돌아야 하는 형벌을 받은 방랑의 영웅에게 시간은 그가 지나가는 통로가 아니라 그가 짊어지는 짐입니다.

다시 말해 이 영화가 정말 특별한 작품이 되리라고 기대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원전은 마르지 않는 샘이고, 감독에게는 그것을 다룰 기술적 수단과 지적 기질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고편은 잠시 멈칫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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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하게 고른 2분짜리 영상이 던지는 질문만으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예고편은 광고물이지 학술 교정본이 아닙니다. 되도록 많은 관객에게 영화의 매력을 되도록 넓게 알리려고 만듭니다. 예고편에 세미나 수준의 엄밀함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예고편 속 몇몇 선택은 7월 개봉까지 기다리지 않고 따져 볼 만합니다.

첫째는 언어의 문제입니다. 호메로스의 시에는 특유의 말투가 배어 있습니다. 말이 우주의 질서만큼 무게를 지니는 세계의 격식 있고, 위계가 분명하며, 경건함이 가득한 언어입니다. 로마의 아들은 아버지를 pater라고 불렀을 것이고, 그리스의 아들은 patēr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이지만 그리스어이고, 마찬가지로 법적 권위와 종교적 경외, 한 집안의 의례적 무게를 온전히 담고 있습니다. 어느 쪽도 집안에서 편하게 쓰는 말이 아닙니다. 《오디세이아》에서 텔레마코스와 오디세우스의 관계는 특별히 공들여 짜여 있습니다. 아버지 없이 어른이 된 아들, 불가능한 상황에서 불가능한 집안을 지켜 낸 아들, 낯선 사람이면서 동시에 아버지인 이를 알아보고 끝내 믿는 법을 배워야 하는 아들입니다. 대단히 격식 있고 무게 있는 관계입니다. 그런 장면에서 톰 홀랜드가 맷 데이먼을 “dad”라고 부르게 하는 것은, 그 무게를 가족 코미디의 말투로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밋밋하고 다정하며 철저히 미국 교외 가정의 냄새가 나는 ‘아빠’라는 말로 말입니다. 그 단어 자체가 틀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엉뚱한 세계에 도착했다는 뜻입니다.

병사들을 이끌고 전투에 나서는 데이먼의 “Let’s go”(가자)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 선택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일리 있는 반론을 펼 것입니다. 어떤 영어 표현도 진짜 호메로스답지는 않으며, “Forward!”(전진!)나 “To me!”(나를 따르라!)도 미케네의 지휘관이 실제로 외쳤을 말을 옮긴 것으로는 똑같이 자의적이라는 것입니다. 거기까지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오디세이아》는 역사를 재구성한 작품이 아닙니다. 서사시이고, 서사시는 고양된 언어의 높이에서 움직입니다. 그 언어는 청중에게 이렇게 알립니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에는 신화의 무게가 있다고. “Let’s go”가 알리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영화가 호메로스의 말투가 아니라 우리의 말투로 말하고 있다는 것, 관객을 시 쪽으로 끌어올리는 대신 지금 관객이 있는 자리로 내려가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오디세이아》에서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한 번도 괴물의 크기였던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집으로 가는 길을 찾는 정신의 크기였습니다.

이 선택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언어를 오늘의 일상어 높이에 맞춘 각색은 이미 가장 중요한 도구를 내려놓은 셈입니다. 호메로스의 시가 살아남은 것은 폴뤼페모스가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물론 무섭기는 합니다. 그러나 시가 살아남은 까닭은 오디세우스가 그를 마주하는 장면의 언어가 장엄하기 때문입니다. 말이 곧 신화입니다. 말이 가벼워지면 신화는 그저 줄거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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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편이 불러일으키는 걱정은 언어에만 있지 않습니다. 오디세우스가 제10권에서 만나는 거인 식인족, 라이스트뤼고네스족의 거인 하나가 병사를 나무에 내던지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힘에 나무줄기가 깔끔하게 세 토막으로 부러집니다. 물론 놀런에게는 시적 허용의 권리가 있습니다. 이 장면은 호메로스의 원문에는 없고, 시 속의 라이스트뤼고네스족은 괴물 같은 덩치로 묘사됩니다. 문제는 신화가 아니라 영화에 있습니다. 실물 특수효과와 물리적 무게감, 그리고 디지털 효과에만 기대지 않겠다는 원칙으로 명성을 쌓은 감독이, 요즘 어느 슈퍼히어로 액션 장면과도 구별되지 않는 이미지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호메로스의 라이스트뤼고네스족이 무서운 것은 볼거리 때문이 아니라 비율 때문입니다. 그들은 절벽 꼭대기에서 바위를 던지고, 배를 박살 내 나뭇조각으로 만들고, 물에 빠진 사람들을 물고기처럼 작살로 꿰어 갑니다. 공포는 충격을 보여 주는 화면 문법이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느끼게 하는 규모에서 나옵니다. 영화가 이것을 디지털 소품이 무게 없이 깔끔하게 쪼개지는 장면으로 바꿔 놓으면, 신화는 더 강렬해지지 않습니다. 관객이 이미 백 번은 보았고 이제는 무서워하지 않게 된 장르 속으로 길들여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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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 선택은 2분짜리 예고편만으로 판단하기가 더 어렵고, 여기서는 조심해야 합니다. 배우는 놀라움을 줍니다. 예고편에서는 어긋나 보이던 연기가 완성된 영화에서는 꼭 맞는 연기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렇더라도 몇 가지 우려를 말하는 것이 지나치지는 않습니다. 맷 데이먼은 자기에게 맞는 영역에서는 진짜 재능을 지닌 배우입니다. 지적인 보통 사람, 압박 속에서도 유능한 전문가, 스스로를 낮추는 재치 같은 역할입니다. 오디세우스라는 배역이 요구하는 것은 다릅니다. 여신의 연인이었고 괴물의 포로였으며, 동료들이 잡아먹히고 물에 빠지고 짐승으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그 모든 것을 주변 세상보다 빨리 생각함으로써 살아남은 사람의 지치고 변덕스럽고 위험한 내면입니다. 그 연기는 무언가를 남겨야 합니다. 눈빛 속에 끝내 풀리지 않는 무언가를. 데이먼이 그 영역에 들어설 수 있을지는 예고편이 답해 주지 않는 열린 질문입니다. 한편 로버트 패틴슨이 연기하는 구혼자는 밋밋한 미국 억양으로 말하는데, 거기에는 뚜렷한 해석적 목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세계가 오래되었다는 신호를 주지도 않고, 이타카의 궁정이 어떤 소리를 낼지에 대한 일관된 구상에 인물을 붙들어 두지도 않습니다. 그 집안의 언어 풍경은 상상해서 빚었다기보다 짜 맞춘 것처럼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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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편에 보이는 물질문화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겠습니다. 이것 역시 영화가 그 세계에 정말 들어가 살았는지, 아니면 그 세계의 옷만 빌려 입었는지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배들이 어딘가 맞지 않습니다. 선체의 윤곽이 청동기 시대 지중해 배와 다릅니다. 50명이 노를 젓던 펜테콘테르 특유의, 물 위에 낮게 깔린 날렵한 모습이 없고, 훨씬 뒤 시대의 배처럼 물에 무겁게 잠겨 있습니다. 병사들의 갑옷은 청동이 아니라 가죽입니다. 신화를 다루는 작품이라면 변명의 여지가 없지는 않습니다. 호메로스의 세계부터가 엄밀한 고고학적 정확성에서 몇 걸음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디자인은 미케네의 군사 문화를 깊이 생각해 해석한 결과라기보다 중간 예산 판타지 시리즈의 의상부 작품처럼 보입니다. 조사를 거친 세계와 느슨하게 상상한 세계를 가르는 정밀함이 아쉽습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구체적이고 손에 잡히는 세부로 가득합니다. 청동 정강이받이, 해안에 검은 선체의 도시처럼 끌어 올려 놓은 배들, 포도주처럼 검붉은 바다. 그것은 분위기만 풍기는 고대가 아니라 분명히 존재하는 하나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영화의 화면은 막연한 고대를 떠올리게 할 뿐입니다. 요즘 영화가 진지함으로 착각하곤 하는, 거칠고 채도 낮은 화면입니다. 이는 제작진이 진실보다 분위기를 겨냥했다는 신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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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피할 수 없이 번역의 문제에 이릅니다. 놀런은 인터뷰에서 에밀리 윌슨이 2017년에 옮긴 《오디세이아》가 이 작품에 접근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밝혔습니다. 윌슨은 진지한 고전학자이며, 이 시의 영어 완역본을 펴낸 첫 여성입니다. 윌슨의 번역에는 분명한 미덕이 있습니다. 운율이 절제되어 있고, 그리스어 원문에 꼼꼼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이전 번역자들이 매끄럽게 덮어 버린 뉘앙스를 놓치지 않습니다. 래티모어나 페이글스의 더 장중한 말투로만 호메로스를 만났을지도 모를 독자들에게 호메로스를 건네주었으니, 교육적으로도 진짜 공헌을 했습니다.

하지만 교실에서 입문서 역할을 하는 번역과 신화적 서사 영화의 토대가 되는 번역은 다릅니다. 그 차이는 시의 첫 행에서 드러납니다. 새뮤얼 버틀러는 이 행을 “말해 다오, 오 무사여, 멀리 널리 떠돌았던 저 재주 많은 영웅의 이야기를”(Tell me, O Muse, of that ingenious hero who travelled far and wide)라고 옮겼고, 페이글스는 “내게 노래해 다오, 무사여, 그 사람을, 굽이굽이 꺾이고 휘는 그 사람을 / 거듭거듭 항로에서 밀려난 그 사람을”(Sing to me of the man, Muse, the man of twists and turns / driven time and again off course)이라고 옮겼습니다. 윌슨은 “복잡한 남자에 대해 말해 다오”(Tell me about a complicated man)로 시작합니다. 나름대로 정확한 표현입니다. Polytropos는 실제로 ‘여러 번 방향을 트는’ 정도의 뜻이고, ‘복잡한’은 그 뜻의 그림자를 담아냅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오늘의 심리학 어휘에 손을 뻗습니다. 신화를 부르는 기원의 언어가 아니라 자기계발과 치유적 성찰의 언어입니다. 복잡한 남자는 상담실이나 세미나실에서 이야기하는 대상입니다. 여러 번 방향을 트는 사람은 밤하늘 아래, 신들이 귀 기울이는 가운데 노래하는 대상입니다.

예고편을 보면 이 차이가 각본의 말투를 정한 듯합니다. 그렇다면 영화는 호메로스의 우주를 훨씬 소박한 무언가와 맞바꾸었을지도 모릅니다. 집으로 가는 길을 찾는 한 복잡한 남자의 이야기 말입니다. 그것도 나름의 의미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의 본모습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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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오디세이아》가 실제로 무엇에 관한 시인지 한마디 하겠습니다. 진짜 위험은 여기에 있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에는 서양 문학의 위대한 모험 몇 가지가 담겨 있지만, 근본적으로 모험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 시가 깊이 생각하는 것은 질서와 혼돈, mētis와 맹목적인 힘의 관계입니다. 견디는 법을 배운 사람의 참을성 있고 깨어 있는 지성이, 그를 잊어버린 세계의 폭력적이고 탐욕스러운 무질서와 어떻게 맞서는지를 성찰합니다. 오디세우스는 이십 년 동안 질서를 되찾으려 애씁니다. 문자 그대로도, 비유적으로도 괴물 같은 힘들에 맞서 자기 왕국과 아내와 아들과 정체성을 되찾으려 합니다. 《오디세이아》의 괴물들, 곧 퀴클롭스와 라이스트뤼고네스족과 스킬라와 카륍디스는 액션 장면 속 장애물이 아닙니다. 인간의 문명과 인간의 지성이 끊임없이 맞서 싸워야 하는 혼돈의 화신입니다.

괴물을 앞세우느라 그 괴물을 꾀로 이기는 정신을 뒤로 밀어낸 영화는 원작을 잘못 읽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고편을 보면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을지 모른다는 걱정을 완전히 떨쳐 내기 어렵습니다. 볼거리에 굶주리고 내면의 삶을 참아 내지 못하는 요즘 액션 영화의 시각적 문법이, 이 시를 점령해 버렸을지 모른다는 걱정입니다. 이 시의 핵심 행동은 언제나 인지적이고 언제나 윤리적이며, 한 사람이 무엇을 부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생각하고 선택하고 견디느냐의 문제인데도 말입니다.

놀런은 이보다 나은 것을 만들 수 있는 감독입니다. 오래 남는 그의 영화는 주먹의 영화가 아니라 정신의 영화입니다. 예고편이 가끔 그러듯이 이번에도 영화를 잘못 보여 준 것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충격과 속도를 기준으로 장면을 고르고, 흥분을 위해 뉘앙스를 희생하고, 깊이 대신 표면을 보여 준 것이기를 말입니다. 기술적 야심은 진짜입니다. 감독의 지성도 진짜입니다. 원전은 마르지 않는 샘입니다.

7월에 도착할 영화가 그 유산을 기릴지, 아니면 배경만 빌려 갈지는 아직 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그동안 에머슨 라틴은 매일의 일을 이어 갑니다. 진짜 베르길리우스를 읽고, 진짜 육보격 시행에 귀 기울이면서, 영화가 호메로스를 어떻게 다루든 시 자체는 그로 인해 작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마음 놓고 있습니다. 이 시는 이천오백 년을 살아남았습니다. 여름 블록버스터 시즌도 살아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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